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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Mid-Life
계몽사상의 의미/볼테르/로크/몽테스키외/루소 본문
계몽사상의 의미
영국은 17세기에 이미 시민 혁명(청교도 혁명·명예 혁명)을 치르고 민주주의 터전을 닦아 민주 정치가 뿌리를 내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18세기 말까지도 봉건 제도의 뿌리가 남아 있었고, 왕의 전제 정치는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낡은 제도와 그릇된 정치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 그들은 절대주의 사상에 반대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힘으로 과거의 모든 역사적 권위와 전통을 비판하였다. 곧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회의 모순을 없애고 합리적인 사회를 건설 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을 계몽 사상이라 한다.
계몽 사상은 절대주의 정치가 가장 심했던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 프랑스 혁명의 정치 이념이 되었다. 프랑스 계몽 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볼테르>는 낡은 제도와 교회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이라는 유명한 책을 써서, 전제 정치를 막기 위해서는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루소는 그가 쓴 <민약론>등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었다. 그의 주장은 볼테르나 몽테스키외보다 급진적이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의 급진 세력인 자코뱅 당에 영향을 주었다.
( 볼테르 )
1. 계몽사상 :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프랑스혁명에 원리를 제공한사상.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사상활동의 저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다
2. 계몽사상가들의 주장
[로크] -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支柱)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몽테스키외] - 영국의 의회 정치를 찬양하여 그의 저서〔법의 정신〕에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분립을 주장,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의 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볼테르] - 영국의 자유주의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이상적인 자연법칙을 중시하여 당시의 프랑스 사회를 맹렬히 비판, 크리스트교 및 그 교회를 비판하고, 순수한 윤리와 이성에 입각한 사회개혁을 주장
[루소] -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부르짖으며, 자연은 인간을 자유·평등·행복하게 만들었지만 문명과 사회가 인간을 악과 불행속에 빠뜨렸다고 주장, 혁신적인 인민 주권을 강력히 주장 이러한 루소의 인민 주권론은 몽테스키외의 삼권 분립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의 지도적인 이념이 되었다.
로크 - 영국의 계몽사상의 원조.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
3. 볼테르 생애
이탈리아에 르네상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위대한 인물은 종종 그자체로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 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살펴볼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de Voltaire, 1694~1778) 역시 예술과 자유, 평등의 나라를 자부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문화상품' 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생전에 이미 30만부이상의 베스트셀러'를 냈던 인기 작가였을 뿐 아니라 그가 머문다는 이유로 한 마을의 인구가 열 배 이상 불어날 만큼 사람을 끄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광신에 사로잡혀 부패한 교회, 왕권이 흔들리고 봉건 영주들의 권력이 무너져 가던 계몽의 시대, 그의 재치 넘치는 신랄한 현실 풍자는 사람들의 가슴을 저항심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되어 가고 있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자유와 민주적인 제도들을 대표하는 '시대정신' 이었다. 그래서 후대에 빅토르 위고(V. Hugo, 1802~1885, 프랑스의 극작가․소설가)는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 종교 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젖먹이 시절부터 신과 틀어진 사이
볼테르는 1694턴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젖먹이 시절부터 하느님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너무 허약하게 태어나서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한 부모는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나중에 정식으로 세례를 받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법원 관리였던 아버지는 꽤 부유한데다가 어머니도 '귀족적 취향을 지녔다고 하니,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양과 예술에 익숙한 환경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문학하는 이들은 아무 쓸모없을 뿐더러 친척에게 폐만 끼치다가 결국 굶어 죽을 자들' 이라고 폄(남을 헐뜯어 말함)할 정도로 대단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똑똑한 둘째 아들이 자기처럼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볼테르가 택한 길은 ‘문학’ 이었다. 글재주를 알아본 이웃의 부유한 부인이 책값에 쓰라고 2천 프랑을 물려준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재능이 있기는 했다. 1711년, 열여섯 살의 볼테르는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예수회(16세기 중엽,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신교에 대항해 가톨릭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한 수도회)학교에 입학한다. 천재들은 종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을 스스로 깨우치곤 하는데, 볼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는 학교 측이 그토록 강조했던 신앙이 아니라 신을 정밀하게 의심하는 법을 배웠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쓰였던 정교한 논쟁술을 그는 신을 의심하는 데 썼던 것이다.
또한 볼테르의 생활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그는 박사들과 함께 신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을 벌일 만큼 진지하고 학구적이었지만, 한편으로 매우 활달했고 심지어 방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 인지 사람들은 그의 ‘방탕’ 에 관대하기만 했다. 뛰어난 재치가 그의 악행마저 유쾌한 사건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궁전의 바보들을 쫓아내라
1715년, 스물한 살의 볼테르는 파리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 낸다.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가 죽고 나자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攝政,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때에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행위나 또는 그 사람을 가리킴)이 다스리던 시기, 어느 면에서도 태양왕의 시대보다 나을 것이 없던 때였다. 권력층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높아지면서 ‘비꼬기의 천재’ 볼테르의 능력도 빛을 내기 시작한다. 온갖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에 대한 시민들의 심정을 적절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섭정이 예산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왕실 마구간의 말을 절반으로 줄이자, 볼테르는 '차라리 궁전에 가득 찬 바보들(귀족들을 말함)을 반쯤 쫓아내는 것이 나을 것' 이라며 빈정댔다. 젊은 볼테르는 점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거리를 떠돌던 정부에 대한 비난과 독설은 모두 볼테르가 한 말로 여겨질 정도였다. 권력층이 그런 그를 좋게 보았을 리 없다. 한번은 섭정이 왕권을 넘본다는 소문을 다룬 풍자시가 나돌았는데, 이번에도 볼테르가 그 시의 작가로 지목받았다. 화가난 섭정은 마침내 그를 바스티유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명성을 얻기 시작한 볼테르는 이곳에서도 확실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죄수’인 그가 교도소장과 같이 식사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희곡 『오이디푸스』를 쓰는데, '아루에'라는 본명을 버리고 '볼테르' 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부들 학식은 ․․․ 우리들의 소홀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믿고 스스로 모든 것을 보자."
권력욕과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를 은근히 조롱하고 우리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을 믿으라는 말에서 지극히 '볼테르 다운' 도전적인 분위기가물씬 풍긴다.
그 당시는 신분의 차별이 존재하던시대라, 천재인 그로서도 귀족들과의 사이에서 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선이 있었다.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던 볼테르는 1721턴 어느 연회에서 높은 직위의 귀족에게 대놓고 말대꾸를 하다가 하인에게 흠씬 얻어맞고 만다. 격분한 볼테르는 다음 날 그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바스티유감옥에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이유로 유명 인사를 감옥에 오래 가두는 것은 정치권에서도 부담이 되는 법이다. 결국 그는 프랑스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영국으로 추방된다. 그 뒤 볼테르는 3년여 동안 영국에 살면서 크나큰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 영국은 왕의 목을 자르고서라도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다. 절대군주가 지배하던 그 당시의 프랑스와 비교해 볼 때 영국은 자유의 나라 그 자체였다. 그는 왕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 영국 의회와 언론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조나단 스위프트(J. Swift,1667~1745, 아일랜드의 작가)와 뉴턴(T. Newton, 1642~1727, 영국의 물리학자․수학자)을 만난 것도 모두 이 무렵의 일이다 특히 뉴턴은 볼테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인가에 대해 논쟁을 한다면 ‥‥ 뉴턴이라고 대답하겠다. 우리는 진리의 힘으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사람을 존경하지만, 폭력으로 우리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엄밀한 논증에 기초한 뉴턴의 자연 과학은 볼테르에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도 뉴턴을 소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철학자 만이 역사를 쓸 수 있다.
1729년 섭정이 귀국을 허락하자 볼테르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는 그 뒤 5년간 다시 ‘파리의 술이 혈관에 흐르고 정신은 붓끝에 넘치는' 생활을 한다. 『찰스 7세의 역사』는 이 시기에 쓴 작품이다. 그는 그 당시 관행과 달리 '신의 뜻이 역사를 이끌고 있다.'는 식으로 글을 써 나가지 않았다. 아울러 왕을 중심으로 써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소설 같은 문체로사실의 전후 관계에 기초해 인간 정신의 발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그 뒤에도 『러시아 사』, 『프랑스 사』, 『루이 14세』 등 여러 역사 책을 저술했는데, 이 속에서 그는 '역사 철학' 이라 할 만한 새로운 탐구 방법을 세웠다.
나의 목표는 사소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나는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 인간이 어떤 단계를 밟아 야만 상태에서 문명을 이룩해 왔는지 알고 싶다."
볼테르는 역사를 꿰뚫어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를 '예술과 정신의 진보'에서 찾았다. 그는 이런 원리를 깨달은 철학자만이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 당시 역사 연구의 관행에서 벗어나, 중국․페르시아․인도의 역사도 역사 속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 이라는 생각으로 유럽의 역사만 다루었던 그 당시 교회의 역사 해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1734년 볼테르는 마흔의 나이에 또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힐 위기에 처한다. '자유의 나라'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한『철학서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출간되어 권력자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그는 또다시 파리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의 사트르 공작 부인과 함께 그녀 소유의 시에레 성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
볼테르는 시에레 성에서 십수 년을 보낸다. 그는 생전에 99권의 저서와 2만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는데 상당수는 성에서 은둔하던 이시기에 씌어졌다. 하지만 사교계의 인기 스타였던 그는 이곳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적인 재치와 쾌락적인 생활태도를 즐겼던 그는 이미 수많은 팬들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치 ‘성지 순레’를 하듯 그를 찾아왔고 편지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중에는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왕(1729~1796, 독일 태생 러시아의 여제)도 있었다. 여왕은 심지어 그를 ‘쾌락의 신’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엄숙 경건' 이라는 포장 속에서 온갖 악행이 행해지던 시대에 그의 생활태도는 퇴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을 솔직하게 누릴 줄 아는 건강한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적은 내가 처치하겠습니다.
이 ‘화려한 은둔생활’은 1749년 사트르 공작 부인이 죽으면서 끝난다. 그 뒤 볼테르는 그를 마치 ‘신하가 왕을 존경하듯’ 바라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프러시아 궁정으로 간다. 프리드리히는 그를 비롯한 소수의 지식인들과만 저녁 만찬을 즐겼는데, 이것은 볼테르에게도 큰 즐거움이었던 듯하다. 볼테르는 "50년 동안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항구를 발견한것 같다."라며 기뻐했다. ‘사상의 왕’과 '현실의 왕' 은 둘 다 재치 넘치고 지성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오해로 이 둘의 관계도 이내 틀어졌다. 볼테르는 황제가 금지한 책을 구입하여 분노를 샀고 황제가 금지한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프러시아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하지만 조국 프랑스에서도 이미 쫓겨난 그는 갈곳이 없었다. 1758년 예순네 살의 볼테르는 마침내 스위스 국경 지대 시골 마을 '페르네'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그늘 이곳에 은둔하며 창작과 저술에 몰두할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가 가는 곳은 어디건 사실상 ‘유럽의 정신적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온 뒤로 페르네의 인구는 수십 배로 늘어났을 뿐더러 ,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심지어 볼테르가,"하느님, 저를 친구들에게서 구원해 주소서. 내 적은 내가 처치하겠습니다."라고 뇌까릴 정도였다.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면 볼테르의 삶은 이제 시골 페르네에서 평안하게 끝날 운명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광기(狂氣)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무렵에 있었던 신교도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잔인한 탄압, 성상(聖像, 기독교에서 이르는, 그리스도나 성모의 초상)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 채로 청년을 태워 죽이는 무자비한 종교 재판, 리스본(포르투갈의 수도) 대지진을 신이 준 재앙으로 여기고 ‘속죄’를 위해 사람들을 산채로 죽이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시대의 지성' 볼테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는 농담할 때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격렬하고도 논리적인 비판을 통해, 그 당시 유럽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파렴치를 분쇄하라."라는 유명한 말로 끝나는 비판적인 글, 세상의 모든 악행을 좋게 해석하려는 신학의 교리들을 비꼬는 『캉디드』는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이재(理財), 재물을 유리하게 다루어 씀)에도 밝았다. 말년에는 대저택과 2개의 별장, 160여 명의 시종을 거느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또 그는 엄청난 재산과 지적인 영향력을 이용해, 사회적으로 탄압받던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도 앞장섰다.
천재에게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1777년 여든세 살의 볼테르가 파리로 귀환하자,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몰려나왔다고 한다. 아울러 여든 살에 쓴 그의 희극 『아레느』가 상연되기도 했는데 그 당시 극장의 분위기는 꼭 요새 아이들 스타의 콘서트 공연장 분위기였던 것 같다. 관객들은 내용에 상관없이 볼테르에 대한 열광만으로 장면 장면마다 환호성을 질러 댔다고 한다. 그 바람에 극장에 들어오던 외국인들은 정신 병원에 잘못 들어온 줄 알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열정과 흥분으로 가득 찬 생활은 80대 노인에게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볼테르는 파리로 귀환한지 1년 만인 1778년 여든네 살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거부했으므로 기독교 의식에 따라 묻힐 수 없었지만, '천재에게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린 시골 신부의 배려로 성지(로번,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어, 신성시되는 땅)에 매장되었다. 뒷날 그의 유해는 프랑스 혁명의 주체 세력들에 의해 프랑스의 국가적인 영웅들의 묘지 ‘판테온’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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